지금의 한국경제가 위기냐 아니냐를 놓고 정부의 진단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같은 위기가 또 다시 올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반면, 유일호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근거 없는 경제위기론 조장은 국가경제에 도움이 안된다고 반박한다. 물론 유 부총리가 겨냥한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야권으로 대표되는 정치권이지만, 정부가 경제위기론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입맛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 수시로 바뀌는 위기론에 대한 정부의 진단
유일호 부총리는 21일 정부세종청사와 정부서울청사에서 화상회의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통해 “근거 없는 경제위기론을 조장하며 경제 심리를 위축시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경제 활성화를 위해 현장에서 뛰고 있는 국민과 기업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유 부총리는 정치권 일각, 정확히는 야권에서 문제삼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경제실패론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는 “최근 일각에서 편협한 시각으로 경제 지표를 왜곡 해석해 근거 없는 경제실패론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덧붙였다.
평소 부드러운 어법을 구사하는 유 부총리가 작심한 듯 독한 발언을 쏟아낸 것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정부 비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 대표는 지난 18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선거대책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정부여당은 총선에 모든 것을 집중해서 경제정책에 대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다”며 “이것이 우리당에서 4·13총선을 지난 8년간 정부와 새누리당의 경제정책 실패를 심판하는 선거로 잡은 이유”라고 꼬집었다.
문제는 경제위기론을 보는 유 부총리의 관점이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다. 유 부총리는 지난달 25일 공공기관장 워크숍에서 “수출부진이 심화되고 민간의 활력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자칫 잘못하면 힘겹게 살린 경제회복 모멘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다”고 걱정했다.
유 부총리는 이에 앞서 지난달 지난달 22일 열린 세관장회의에서는 “수출부진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위협요소”라며 위기론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한달 만에 ‘근거 없는 경제위기론 조장’이라며 위기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재계의 반응이다. 그 사이 경제지표가 크게 좋아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더 의아하다.
대통령의 경제인식도 위기와 낙관을 오가고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박 대통령은 연초 대국민담화(1월13일)에서는 “국가를 지탱하는 두 축인 안보와 경제가 동시에 위기를 맞는 비상 상황에 직면했다.
선제적인 개혁을 않는다면 IMF 위기 당시 겪었던 대량 실업의 아픔과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다시 치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달 수석비서관 회의(2월22일)에서는 “지금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외 경제여건이 어려워진 상황”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은 지난 7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경제 불안 심리가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면 안 된다”고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21일 부석비서관회의에서는 “세계 경제도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우리 경제가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또 다른 IMF와 같은 국가적 위기를 겪게 될 지도 모른다”고 다시 위기론의 불을 지폈다.
■ 위기냐 아니냐를 떠나 경제위기론이 입맛 따라 바뀌는 게 문제
박 대통령이 경제위기론을 다시 거론한 배경에는 정치권에 대한 압박의 의미가 크다. 박 대통령이 위기론을 강조하면서 “선거 기간 멈춰있는 3~4개월 동안 국민들을 위해 정치권과 국회가 아무 일도 못하고 오직 각자의 정치만 하고 있다면 그만큼 잃어버린 시간들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문제는 위기론을 바라보는 정부의 이중잣대다. 대통령은 국회의 무능을 질타하기 위해 위기론을 거론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국회가 도대체 하는 일이 뭐냐고 힐난한 것이다.
반면 부총리는 야당이 위기론을 조성, 경제심리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쓸데없이 위기론을 거론, 국가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위기론을 부각시켜도 되고, 야당은 하면 안된다는 이상한 논리적 모순을 정부 스스로 보이고 있는 셈이다.
사실 위기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동안 수없이 많이 제기됐고 결과적으로 보면 맞는 것보다 틀린 것들이 더 많았다. 해마다 3월이 되면 3월 위기론이 기승을 부렸고, 위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6월 위기론이 고개를 들곤 했다.
올해도 새해벽두부터 중국경제가 크게 흔들리자 어김없이 3월 위기론이 제기됐고 불과 얼마 전까지 환율이 급등하는 등 위기론이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은 게 사실이다.
미국의 금리동결을 계기로 시장의 분위기는 공포에서 낙관으로 많이 바뀌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자금이탈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면서 큰 폭으로 떨어져 1200원대에서 1160원대로 주저앉았고 주식시장에서는 KOSPI가 2000선에 바짝 다가섰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경제지표가 바뀌지 않는 한 위기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실제 중국정부가 발표한 2월 수출증가율은 전년 동월대비 25.4%나 급감했다. 이는 2009년 5월의 26.4% 이래 81개월만에 최대 감소폭이어서 한동안 잠잠하던 중국변수가 다시 악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데이비드 립턴 IMF 수석부총재도 최근 전미실물경제협회(NABE) 연례회의 강연에서 “세계경제가 궤도 이탈 위험의 기로에 놓여 있다”고 경고했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달 24일 발간한 글로벌 금융리스크와 관련한 보고서를 통해 “실물경기 및 금융상황이 취약한 국가들이 많아 한 지역의 리스크 발생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도래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공교롭게도 4·13 총선이 다가오면서 위기론을 대하는 정부의 입장이 180도 바뀌고 있는 것은 결국 경제논리가 아니라, 정치논리에 따른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국세청장과 건교부장관을 역임한 이용섭 더민주당 총선정책공약단장은 “법안통과를 위해 국회를 압박할 때는 경제위기론을 앞세우고, 경제실패론이 제기되니까 위기론을 조성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다”고 지적했다.